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늦가을의 사랑, 1974 명작

익스랩 최고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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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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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평 : 숭고한 로맨스 이면에 숨겨놓은 파스빈더의 지적인 성찰. 완벽한 제목까지.

별점 : ★★★★☆ (4.5)

 

 

 

 

파스빈더 감독의 작품 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본인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내 개인적 의견으로도 파스빈더의 작품 중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파스빈더 감독은 1974년에 [마르타]와 [에피 브리스트] 라는 큰 규모의 영화 두 편을 찍는다.

그 두 영화의 촬영 사이에 찍은 영화가 바로 이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단 15일(!) 만에 촬영 된 영화다. 

이 걸작이 단 15일만에 만든 영화라고?
영화에서 깊은 감동을 받으신 사람이라면, 조금은 배신당한 기분이 들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파스빈더 본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두 대작 영화 제작 사이에

생긴 짬을 메우기 위해 만든 영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출연한 배우들도 거의 무명에 가까웠으니까 말이다.

뭐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이 영화가 파스빈더 본인의 작품에서 뿐 아니라

영화 역사상에서도 길이 남을 명작임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

대단한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치밀하고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야만 되는 건 아니니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에서 배우들은 직선적이다 못해, 굉장히 경직되고 절제된 연기를 선보인다. 파스빈더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는, 대부분 이 영화와 다른 느낌의 연기를 한다. 그래서 이 연기스타일이 과연, 무명의 배우를 캐스팅해서 부자연스러워진 것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 처음엔 조금 헷갈렸다. (어느정도 헷갈리는건 지금도 마찬가지)

결론만 말하자면, 이러한 연기 스타일은 감독이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파스빈더는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절제' 연기를 통해, 인물들의 시선을 부각시킨다. 
'시선'의 한 예로,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인 알리와 에미를 '노려보는' 장면이 유독 많다. 이런 장면들에서 파스빈더는 의도적인 절제연기와 롱테이크 숏을 통해서, 주위 인물들의 편견어린 시선을 독특한 느낌으로 포착해낸다. 무언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면서도, 강한 현실감을 준다.

사실 현실에서는 누군가를 경멸하고 조롱할 때도, 의식적으로 노려본다거나 표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현실감을 감춤으로써 더욱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만히 자리에 선 채로 의식적으로 그들을 노려보기 때문. 에미가 콜라를 마시러 카페에 들어온 첫 장면부터 시종일관 그렇다.

 

 

 

 

 

영화에서 모로코 출신의 정비공인 알리의 진짜 이름은 알리가 아니다. 알리라는 이름은 유색인종 외국인 노동자들을 일컫는 통칭 같은 이름이다. 

자신을 알리라고 소개하는 그는, 자신을 향한 모든 편견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독일인 주인을 모시는 개” 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하기도 한다. 비슷한 처지로, 청소부 일을 하는 60대 과부인 에미는 그런 알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된다.

그러면서도 묘한 긴장감과 비현실성의 기운이 두 주인공을 맴돈다. 이 느낌이 참으로 묘한데, 영화 전체에 깔리는 배경음악처럼 잔잔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보는 입장에서는, 이 커플이 반드시 난관을 겪게 되고, 불행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에 증오와 적대감을 아주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하지만 에미는 그들의 편견과 증오를 ‘질투’ 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에미를 통해 파스빈더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적대감이나 증오심, 편견의 원천이 ‘질투’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는 편견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이상적인 자세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역설적인 장면들이 보여지기도 한다. 편견의 대상인 주인공들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에미와 알리는 시종일관 증오의 대상이 되며 약자의 입장으로 보이지만, 그들 역시 역설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아랍인과의 결혼 때문에 창녀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계단에서 혼자 빵을 먹었던 에미는, 자신과는 다른 유형이지만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웃 여인이 (바로 자신이 빵을 먹었던 그 자리) 혼자 빵을 먹는 것을 보고서도 그저 그 상황을 관조한다. 알리 역시 이상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데, 그는 에미와 한 집 살이를 하면서도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기도 하며, 영화 후반부에는 노름에 손을 대기도 한다. 그 외에도 당의 단원이었던 에미와 함께 히틀러가 자주 갔던 식당에서 조촐한 기념을 하는 장면 또한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객관적인 문제점을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감독 자신의 시점에서 다분히 주관적인 태도로 불편한 편견들과 관점들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아들이 TV를 부수거나,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경멸을 드러내는 주민들의 대사 등으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기도 하고, 은유적인 역설을 주인공들이 몸소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홀로코스트의 유대인들이 아니고, 에미의 말처럼 “자신의 인생을 선택” 할 수 있다. 파스빈더는 불쌍한 약자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깊은 푸른 호수에 돌을 던져 물결을 일으키고, 관객의 감정을 심연에서 끌어올린다. 어쩌면 불편한 현실을 반영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단지 불편한 현실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는 파스빈더 자신의 사상과 비판이 들어가있다. 나치즘, 인종 차별과 과거사등 당시 독일 사회가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비평의식을 표면으로 드러내면서도 파스빈더가 하고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군국주의의 태동에 대한 비판과, 경계심을 갖자는 마음이다.
과거의 파시즘과 현재(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의 자본주의의 결합은 새로운 형태의 군국주의를 탄생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새로운 형태의 군국주의는, 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구시대의 군국주의를 새로운 방식으로 표방하는 것이었다. 그 사상중의 하나가 바로 인종 차별과 나치즘의 회귀였다.

영화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아주 은근슬쩍 하고 있다.
속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은연중에 비판적인 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알리와 에미는 '차별'을 받고 있지만, 영화의 어느 지점에서 이러한 갈등은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그 해소의 계기는 '자본'과 '힘'이다. 

이웃 사람들이 알리와 에미를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 그 갈등이 해소되고, 이는 당시의 군국주의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자본 앞에서는 그들도 결국 현실성을 되찾고 만다.

 

 

 


 

 

 

물론 파스빈더는 자신의 의도를 약간은 숨긴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당연하지만, 이 영화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본질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비판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숭고한 사랑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마도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영화가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출처 : https://yamalab.tistory.com/60?category=73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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